안녕하세요!
오늘은 168년 만에 풀린 최대 미스테리였던
북극 탐사대 함선에 대해서 나눠 볼까 해요.
그럼 이야기 시작해 볼게요!
때는 180년 전인 1845년 5월 19일
영국에서 두척의 대형 선박이 출항 준비를 하게 되는데요.
이건 존 프랭클린이 이끄는 북극 탐사대입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인류에게는 바닷길은 미지였고 또 북극 항해는
모험가에는 꼭 도전해 보고 싶은 항로이기도 했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북극은 강한 추위와 또 녹지 않은 빙하도 있고 표면에는 얼음으로 덮여 있기 때문에 여기에 배를 가지고 가는 건 쉽지 않고 목숨을 걸어야 하는 위험한 모험이었죠.
하지만 존 프랭클린 탐사대가 대장정을 준비하게 됩니다.
두척의 배 안에는 총 130여 명의 해군 장교 사병들이 탑승하죠.
존 프랭클린 사진 사진 출처: 나무위키
60세가 되어가는 존 프랭클린이 대장인데
그의 경력은 화려하죠, 14살부터 사관후보생 입관을 했고
1801년 코펜하겐 해전 그리고 칼레 해전에도 참전을 했죠.
그러기에 항해 그리고 군사 지식에 해박했고요.
또 이미 육로로도 북극해까지 탐험을 마친 상태기 때문에 그는 두려울 게 없었죠.
2척의 배는 테러 호랑 이리버스호 입니다.
두척의 배는 범선으로 만들어졌고 그 당시 영국이 보유한 최첨단 기술로 북극 탐사용 전용 배로 만들어졌습니다.
또한 배 안에는 선원 130여 명이 3년간 먹을 수 있는 넉넉한 식량도 실게 되죠.
그리고 북극 탐험의 기간은 2년으로 잡고 떠나게 되죠.
그런데 2달 만인 7월 26일 그린란드와 캐나다 사이 배핏만에서 마지막으로 목격되고 행방이 묘연해집니다.
하지만 2년이 지나고 나서 영국은 심각성을 깨닫고 2만 파운드를 내걸고 본격적으로
프랭클린과 탐험대를 추적하기 시작합니다.
추적이 시작된 1847년부터 수많은 수색대가 북극해로 향하지만
안타깝게도 수많은 수색을 떠난 배에서 프랭클린이 데리고 떠난 사람보다 더 많은 희생자가 나오게 됩니다.
하지만 북극해로 떠난 모든 사람이 실패한 건 아닙니다.
수색을 떠난 지 3년 만인 1850년 여름 수색대에 합류했던 헤이븐 대위가
캐나다 북쪽 비치 섬에서 뜻밖의 흔적을 발견하게 되죠.
프랭클린 탐험대가 소지하고 있던 물건들 그리고 대원 3명의 무덤입니다.
게다가 다시 3년 후 1853년
의학박사였던 레이시가 캐나다 북쪽 에스키모인들에게 결정적인 이야기를 듣게 되는데 에스키모인들의 따르면 북아메리카 대륙의 최북단 지점인 부시아 반도 강에서 백인들이 한 30-40명이 모여있는 집단을 목격했다고 합니다.
최북단이다 보니 매서운 추위가 펼쳐지는 곳인데 30-40명의 사람들이 힘겹게 눈 속을 헤매고 있더라는 겁니다.
게다가 당시 이들은 커다란 배 두척을 반도와 가까운 킹 윌리엄 섬에 버렸다고 했죠.
그 증거로 그들은 배에서 자기들이 가져온 물건들을 레이에게 보여주게 되는데
탐험대의 물건이 맞았고 레이가 급하게 그쪽으로 갔지만 배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죠.
얼마 후 레이가 새로운 에스키모인들을 만나게 되었고
더 충격적인 소식을 듣게 되는데 자기들도 백인 무리를 봤는데 이미 사망한 상태였다.
백인들의 무더기 시신을 발견했고 일부의 시신은 팔다리가 없고 주변엔 솥단지가 놓여 있었는데 그 안에 사람의 것으로 보이는 인육이 들어있었다고 말을 하죠.
그리고 레이는 곧장 영국 정부에 사실을 알렸고 그리고 정부는 결국 탐험 대원들이 모두 사망한 것으로 보고 수색을 중지하겠다 하죠.
하지만 존 프랭클린의 아내 제인 프랭클린은 포기하지 못하죠.
그녀는 남편 존과 마찬가지로 호주 지역을 탐험했던 숙련된 모험가였고 1859년 5월 18일 제인 부인이 고용한 탐험대가 이끄는 수색대가 캐나다 북부의 킹 윌리엄 섬에서 시체 한구를 발견합니다.
게다가 한 메모가 그 시신과 같이 남겨져 있었는데 이 메모를 통해 그동안 미스테리에 빠져있던 탐험대의 행적기 짧게 남아 드러나게 됩니다.
일단 메모에는 탐험대 부단장 크로 지어라는 사람이 남긴 건데 내용을 풀어보자면
탐험대가 1845년 출발을 한 이후 약 1년간 북극해 열도의 비치 섬에서 첫 겨울을 보내게 됩니다.
그곳에서 선원 세명이 사망해 무덤을 만들어 줬고 아까 첫 에스키모인들의 말고 같죠.
그리고 이후 1846년 9월 북극해로 원래 목적대로 다시 항해를 하게 되는데 빅토리아 해협쯤에서 해빙에 갇히게 되는 바람에 이듬해 여름까지 꼼짝달싹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들도 여름까지 기다리고 얼음이 녹으면 항해를 해야겠다 생각을 하는데 데
하필 그해 북극의 기온이 역대 최저였고 여름이 돼도 해빙이 녹질 않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존 프랭클린 대장을 비롯한 선원 23명이 사망을 하게 됨.
여기에 대한 정확한 사인은 적혀 있지 않았습니다.
이후 나머지 대원들은 자초된 배 안에서 남은 식량으로 무려 2년을 버티게 됩니다.
1848년 4월, 이들은 결국 배를 버리고 캐나다 본토 쪽을 향해서 남쪽으로 떠나게 됩니다.
하지만 육지에서도 식량이 떨어져 가고 새로운 먹을 거를 구하지 못하고 결국 그들은 오래 버티지 못하게 됩니다.
메모를 통해서 그간 미스터리가 어느 정도 풀리지만
이상한 점이 남아 있습니다.
130명이 함께 있었는데 지금 발견된 시체는 몇 구가 안됩니다.
그럼 나머지 대원들은 어디로 간 걸까요?
여기에 대해 전문가들은 그쪽 기후를 고려했을 때 북극곰이 시신을 먹어 치웠을 거라고 추측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재인 부인은 끝까지 희망을 놓지 못했죠.
사람들은 말렸지만 그녀는 전 재산을 쏟아부어서 1870년대 수색대를 계속 파견합니다.
그리고 그녀는 끝내 1875년 만 83세의 나이로 남편을 찾지 못하고 사망하게 됩니다.
그 후에 프랭클린 탐험대에 대한 이야기는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히는듯했죠.
그런데 20세기에 들어서 이 사건이 수면 위에 올라왔습니다.
그 계기가 뭐냐면 지난 1980년에 비치 섬에서 3명의 시신이 미라화된 채로 보존돼서 발견이 된 거예요.
근데 더 놀라운 건 부검을 해보고 사인은 결핵으로 밝혀졌는데
이상하게 몸속에서 납성분이 정상보다 열 배가 넘는 수준까지 검출이 된 거예요.
그래서 왜 그랬을까 분석을 하던 중 그 선박이 챙겨갔던 통조림이 지목됩니다.
통조림을 밀봉하는 과정에서 상당량의 납이 사용되었는데 이걸 섭취한 대부분의 선원들이 납중독에 시달렸을 거라는 추정이죠.
그리고 음식이 떨어지자 추위와 굶주림을 이기지 못하고 살인을 저지르고 식인 행위를 저질렀다는 사실도 부검을 통해 확인이 됩니다.
어느 정도 탐험대가 어떤 일을 겪었는지 그림이 그려졌지만 여전히 미스테리는
왜 선원들은 에스키모 인들을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는지 그리고 그 큰 배는 과연 어디로 사라졌는지 의문이었죠.
그러다가 시간이 168년이 흘러 2014년 9월 캐나다 북부 킹 윌리엄 서 근처 해저에서 사라진 함선 가운데 한 척인 에러버스 호가 발견됩니다.
그리고 2년 뒤인 2016년 그 위치에서 100km 떨어진 해서에서 나머지 테러 모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테러로는 비교적 온전한 모양을 갖추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직까지도 선박의 잔해를 분석하고 수거하는 일을 계속하고 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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